한글 연구와 어린이 교육에도 큰 기여
한편, 지석영은 1890년대 후반 독립협회의 주요 회원으로 활약하면서, 밀 재배의 경제성을 설파하고 주시경과 함께 한글 가로쓰기를 주장한 선각자이기도 하다. 한글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은 표시하지 못하는 음이 없고 매우 배우기 쉬운 문자임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이 연구하지 않고 민간에 맡겨버린 결과 혼륜(混淪)과 와오(訛誤)가 심하여졌다고 격렬하게 비난하며 한글을 새롭게 재정비하여 나라의 자주와 부강을 도모할 것을 건의했다. 고종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1905년 [신정국문(新訂國文)]을 공포했는데, 이는 지석영의 작품이다. 신정국문이 학계에 논란을 일으키자 지석영은 한글 연구를 위한 조직으로 1907년 국문연구소를 설립했고, 그가 교장으로 있는 의학교에 국문연구회를 창립했다. 주시경, 박은식 등이 이 연구회의 연구원이었다.
지석영은 또한 한글에 대한 서적으로 [언문]을 저술하는 등 한글연구와 한글운동을 전개해나가면서 한자의 뜻과 음을 한글로 표시하는 방법의 연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옥편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자전석요(字典釋要)]를 펴내기도 했다. 그 외 국채보상연합회 부소장, 대한자강회 평의원, 기호흥학회 부회장 등으로 활발한 사회활동도 펼쳤다.
1899년 지석영의 청원에 따라 최초의 관립의학교가 설립되었고 그는 이 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모태라 할 수 있는 의학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설립된 공식적인 서양의학 교육기관이다. 1907년 의학교가 대한의원 의육부로 개편되면서 학감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910년 사직했다.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뒤 그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은둔의 삶을 살다 1935년 2월 1일 여든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총독부에서 협력을 부탁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고, 3․1운동 등 독립운동에도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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